한재선행상 수상자

“인생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니
당당하게 살아라.
또한 잘된 일은 남의 탓이고
잘못된 일은 내 탓이라고 생각하며 살아라.

(한재 이한오)

2022년 제1회 한재 선행상 수상자 이야기

한재 선행상 수상자

  • 대상

    최연수 님

  • 본상

    김윤경 님

  • 본상

    순영옥 님

  • 본상

    이동훈 님

수상자 이야기

대상

최연수님
 

 



매년 5~6만 명의 청소년들이 학업 부적응, 

가정파탄 등을 이유로 학교 밖으로 나온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향한 시선은 대부분 부정적이며, 

일부는 이들에게 대놓고 혀를 차거나 손가락질을 해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비행청소년들을 보듬어 온 사람이 있다. 

그는 한빛청소년재단 이사인 최연수 씨(60)로, ‘거리의 스승’이라고 불린다. 

그는 30년간 송파구에서 학교 밖의 청소년들을 보호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가 만난 제자들은 약 2천 명이 넘고,

주례를 선 제자도 75쌍이 된다고 한다. 

그는 이제 60대 초반으로 체력이 예전 같지 않지만, 

거리의 스승 생활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조금은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세상 

전남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최연수 씨는 

결혼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적 올리기에만 혈안이 된 학부모들의 모습에 회의를 느낀 그는 

이후 YMCA에서 거여·마천동 일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얼굴을 다 익혀갈 즈음 한 학생이 며칠 째 나타나지 않는 일이 

발생했고, 걱정이 되어 집까지 찾아갔던 그는 충격적인 현장을 맞닥뜨렸다. 

최연수 씨는 “중·고등학생 8명이 본드와 가스 등 환각 물질에 취해 

눈이 풀린 채 바닥에 뒤엉켜 있더군요. 싱크대에는 먹다 남은 라면 냄비와 

그릇이 가득 쌓여있었죠. 어머니는 이혼 후 집을 나갔고,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집을 비울 때가 많 아 동네 형들이 그 집을 아지트로 삼았던 겁니다. 

더 심각한 건 이런 아지트가 주변에 널렸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래도 명색이 강남인데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의 방안에 술병이 뒹구는 

판자촌 아이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이 내가 찾아 야 할 ‘잃어버린 양’이라고 생각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생업이던 학원을 그만두고 1995년부터는 학교 밖 청소년 사업 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5평 정도의 방 한 칸을 빌려 ‘길거리 상담소’를 시작함으로써 

송파구 거여·마천지역에서 본드와 가스 를 흡입하며 방황하는 

위기 청소년들을 지도하게 된 것 이다. 당시 약 30여 명의 학교 밖 청소년들을 

공교육 기 관인 학교로 복학시켰으나 그들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 하고 

다시 자퇴를 반복했다. 이에 2001년부터는 사랑 의 교회 청년들과 함께 

중·고교 과정의 대안학교인 ‘사 랑의 학교’ 를 설립하게 되었다. 

‘사랑의 학교’는 학교 밖 청소년들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 야간 학교이며, 

사랑의 교회 청년들이 자원봉사로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최 근에는 더욱 체계를 갖추고 검정고시나 학습지원, 진로 교육 등을 통해 

학교 밖 청소년들이 지역사회에서 자립 할 수 있도록 돕고 있고, 

현재는 주간 서울형 대안학교 로 학교부적응 중 왕따와 은둔청소년을 위한 

사랑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찾아가는 캠핑카, 찾아오는 아이들 

최연수 씨는 방황하는 청소년들과의 소통을 위해 초기에는 

자전거를 타고 밤마다 거리의 청소년들을 만났으나 2014년부터는 

캠핑카 내부를 상담소로 꾸몄다. 이러한 캠핑카 상담소는 매주 요일별로 

문정공원, 마 천역, 오금공원, 거여공원, 성내천 등 송파구 일대를 

아가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상담소’에 거부감과 거리감을 느끼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저녁때면 아이들이 모일만한 지역 내 공원 등지에 

캠핑카가 거리청소년에게 직접 찾아가는 것이다. 

최근에는 상담뿐만 아니 라 보드게임이나 영화 상영 등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요소도 첨가하여 더 욱 큰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최연수 씨는 “캠핑카 이동상담소를 본격적으로 운영한 것은 2014년 하반기부터인데도, 

벌써 8명의 아이들이 이를 통해 ‘사랑의 학교’에 입교했어요”라고 말하며 뿌듯해 한다.

 


 

학교 밖 아이들이 만들어 낸 놀라운 기적 

최연수 씨의 헌신 덕분에 지금까지 거쳐 간 약 2천 명의 제자들은 

대부분 반듯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최연수 씨를 만난 제자들 중 

고문 변호사가 돼 그를 돕고 싶다던 아이는 법과 대학에 진학하여 현재는 

대기업 에서 근무 중이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던 제자는 

몇 년 전 경찰 시험에 합격했다. 또한, 중2때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학교를 자퇴 하고 오토바이 폭주족으로 방황하다가 19세 때 오토바이 사고로 

온몸에 붕대를 감고 십자인대가 파열됐던 아이는 20세에 마음을 돌이켜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부단한 노력으로 강남에 있는 

현대자동차정비서비스센터에서 성실하게 일했을 뿐만 아니라 

25세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고 

5회 동안 부부 성격검사, 상호간에 강점 찾기, 경제관, 자녀관, 부부생애설계를 하며 

서로가 다른 기질과 환경에서 살아온 과정을 이해하고 함께 꿈을 꾸고 

설계하는 과정을 통하여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되었다. 

“5년 후에는 정비공장 사장이 되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하객들의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합니다”라는 주례사처럼 그 의 제자는 5년 후에 기적처럼 

레이싱자동차를 튜닝하고 정비하는 정비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지금은 2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로서 경기도 부천시에 자신만의 정비 공장을 

개업하여 행복한 가정을 일구고 있다. 춤에 빠져 가출했던 중학생 소년은 

뮤지컬 배우가 되어 한빛 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맡는다고 한다. 

 

이외에도 동대문에 옷 가게를 낸 제자는 철이 바뀔 때마다 옷을 기부하고, 

가락시장에 식료품점을 운영 중인 제자는 매년 간식거리를 보내주고 있다. 

그는 “방황하는 아이들도 2~3년만 집중적으로 잘 돌봐주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습니다.

출 발선이 다르다고 그 아이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미래를 규정짓는 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제 막 인생의 꽃을 피우는, 앞길이 창창한 젊은 친구들은 

언제라도 역전이 가능합니다. 다 만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더불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 그게 바로 

어른들의 몫이죠”라고 말한다. 이처럼 최연수 씨는 사각지대에 있던 아이들이 

사회에 자리 잡고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사는 또 다른 아이들을 후원하는 선순환을 강조한다. 

현재 그는 검정고시를 마치는 후기청소년의 청년자립과 창업을 통한 좋은 

일자리 만들기를 위 해서 노력하고 있다. 디지털기반의 디지털정비사업과 

요리창업, 실내건축인테리어협동조합, 미 디어영상을 통한 창업을 위한 다양한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본상

김윤경 님




김윤경 씨(48)가 운영하는 광주 동구 대인시장에서 ‘해 뜨는 식당’의 

백반 가격은 단돈 1천 원이다. 천 원의 의미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취약계층의 어려운 처지라도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사먹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해 뜨는 식당의 메뉴는 잡곡밥과 된장국, 세 가지 반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식당을 찾는 이들은 노점상인들, 일용직 노동자, 

독거노인, 돈이 없는 학생 등으로,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이렇듯 손님이 늘어갈수록 적자가 나는 상황이지만, 따뜻한 한 끼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사랑과 희망의 상징인 곳이다.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의 선행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선행의 시작, 

어머니



김윤경 씨의 나눔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 고(故) 김선자 씨는 사업실패 등으로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웠던 시절, 

주위로부터 받은 도움을 갚기 위해 2010년 8월 ‘해 뜨는 식당’을 열었다. 

쌀밥 한 그릇, 정성 들여 만든 3가지 반찬, 그 리고 된장국까지 곁들인 천원 밥상을 

적자에도 아랑곳없이 운영하던 어머니는 지난 2015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투병 중에도 식당 일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는 “‘천 원 백반’을 계속 운영해 달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는 어머니와의 약속 을 지키고자 예전 가격 그대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3년만 버텨보자는 각오로 시작했지만, 

3년이 6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식당 운영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최근 코로나19 가 장기화 되면서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후원은 줄었지만 

다른 무료 급식소들이 문을 닫으면서 손님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원가 이하의 밥값을 받기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수록 손해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김윤경 씨는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매달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본업인 보험설계사 일을 병행하는 그이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다시 보험 회사로 출근해야 하지만 “제가 무슨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겠어요? 어머니가 시작한 일이고 꼭 이어달라 는 유언까지 

하셨던 일입니다. 저도 그 한 끼라도 싸게 드시려고 오시는 어른들 뵈면 절대 

그만두어서는 안되 겠구나 하고 다짐하죠”라고 말한다. 이렇듯 김윤경 씨 는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장사’가 아니라 ‘봉사’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식당이 없으면 어르 신들이 끼니를 굶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더 

열심히 운영하고 있다.

 



 

따뜻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 



해 뜨는 식당이 문을 연 후, 식사할 곳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김윤경 씨에 따르면, 매일 약 100명 정도 의 다양한 

사람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방문 하고 있다. 노령연금을 받는 분들부터 

기초 수급자, 좌판에서 물건 파는 분 등이 책상에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서로 친분을 쌓게 되고 정도 나누게 된다고 한다. 사람들 간의 온정은 

식당 주변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해 뜨는 식당의 사정을 잘 아는 주위 식당이나 

상인들이 고기, 쌀, 채소, 고춧 가루, 참기름 등을 후원하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에는 언론과 SNS에 알려지면서 개인 후원과 

대기업, 사랑의 열매 등 여러 단체의 도움까지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자원봉사 센터와 대학생 자원봉사자들도 일손을 돕고자 

모여들고 있다. 두 모녀의 훈기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 를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본상

순영옥님

 


 

순영옥 씨는 낯선 남한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힘들었기에 

동병상련의 입장에서 탈북 청소년들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에 남편 최동현 씨와 함께 2011년 ‘겨레얼 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겨레얼 학교’는 기숙형 대안학교로, 탈북민 자녀들이 일반학교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곳이다. 순영옥 씨는 남편과 함께 번 돈의 

대부분을 학교 운영비로 사용하고 있어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다. 겨레얼 학교를 위한 부부의 노력과 

헌신 덕분에 많은 탈북 청소년들이 보다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며, 

미래를 위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꿈을 꿀 여유조차 없던 탈북 청소년들이 

꿈에 대해 먼저 이야기할 정도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는 순영옥 씨.




북한에서 온 선행 

 

2002년 8월 15일 새벽 4시. 북한 선천군 홍건도에서 대가족 21명이 배에 올랐다. 

그들은 48시간 의 항해 끝에 인천에 도착한다. 순영옥 씨는 “한국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당시를 회고했다. 하루 종일 

주유소 아르바이트, 도시가스 검침, 택배 기사, 신문 배달을 했던 남편과 

더불어 순영옥 씨는 식당 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그러나 

고된 식당 일로 점차 건 강이 악화된 순영옥 씨는 식당 일을 그만두고, 

전문적인 직업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사이버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였고, 3년 반 동안 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보육교사, 청소년지도사, 

건강가정사 5개의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그 무렵 탈북청소년들의 정착문제가 

이슈가 되자 그는 소정의 교육을 받고, 탈북 아동들로만 구성된 진달래 

지역아동센터에서 방과 후 교사로 일하게 된다. 순영옥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2011년 6월 지역아동센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제 능력 밖의 일일까 염려됐고, 센터의 재정 상황도 좋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탈북 아 동을 지원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센터 명칭도 ‘겨레얼’로 바꿨죠.” 초반에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자란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이를 해결 하기 위해 2011년 순영옥 씨와 남편은 10년간 저축한 돈으로 

지역아동센터 맞은편에 ‘겨레얼 대 안학교’를 설립했고, 

본격적으로 탈북 청소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겨레얼 학교 

 

겨레얼 학교는 약 50명의 청소년이 숙식을 하며 검정고시 또는 일반학교로 

편입될 수 있도록 디딤돌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겨레얼 학교의 교사 10명 중 7명이 

탈북민으로 구성되어 있 으며, 순 씨 부부와 함께 정서적 지지뿐만 아니라 

생활지도, 학습지도 등을 통해 탈북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한다. 순 씨 부부와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 덕분인지 아이들은 

여전히 편견에 힘들어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친구들이 신분을 알게 될까 걱정하던 아이들도 요 즘에는 센터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놀이를 즐긴다고 한다. 또한, 처음에는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요 즘에는 먼저 시험지를 들고 자랑하기 

위해 찾아온다고 한다. 이처럼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어려움을 느끼던 

탈북 아이들이지만, 겨레얼 학교를 통해 한국 생활에 즐거움을 느끼며 

더욱 성장하고 있다. 순영옥 씨는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나 는 모습을 

보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겨레얼 대안학교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면서 

먼 곳에서도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부부는 학교 옆에 기숙사를 세웠다. 

부모님들 대부분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많기에 탈북 아동들이 장시간 

생활할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겨레얼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남편 

최 씨는 개인택시를 운전 했었으나, 최근 암투병을 하게 되면서 현재는 

순영옥 씨 홀로 운영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이겨내고 있다. 

재정 상황이 어려 움에도 불구하고, 순영옥 씨 부부는 탈북 선배이자 보호자로서 

앞으로도 탈북 아동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한다

 

 

도움을 받던 사람에서 주는 사람으로



순영옥 씨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겨레얼 학교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이 탈북 청소년들의 꿈을 

응원하는 후원자, 후원기관, 민간단체 등 지역 사회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는 받기만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2014년부터 겨레얼 학교의 

아이들과 함께 어르신복지관, 경로 당, 중국, 동남아 캄보디아로 봉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고 한다. 또한, 2016년에는 ‘꿈’을 노래한 뮤지컬을 겨레얼 

학교에 재학 중인 탈북 청소년들이 직접 배역을 맡도록 기획함으로써 

사회 전반에 탈북 청소년들의 삶 과 꿈에 대해 알렸다. 순영옥 씨와 

남편 최동현 씨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큰 포부를 실현하고 싶다고 말한다. 

장차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확장시켜가고 싶은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그들의 선한 영향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본상

이동훈님



2020년 코로나19가 국내에 발생하자 경희대학교 산업공학과 학생이었던 

이동훈 씨는 코로나맵을 개발하였다. 코로나맵은 코로나19 확진자의 

동선을 지도로 보여주는 서비스로, 확진자 수, 완치자 수, 사망자 수, 

확진자의 이동 경로 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코로나가 발생하고 

최초로 만들어진 코로나 관련 서비스였기에 광고 등 다양한 수익활동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익 목적을 지키고자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동훈 씨는 후불로 지불하는 서버 비용을 사비로 충당하고, 

매일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하고자 잠자는 시간도 줄였다고 한다. 

코로나 19 장기화에 지칠 법도 하지만, 그는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서비스를 하자’는 각오로 현재까지 계속해서 팀원 2명과 함께 코로나맵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코로나맵’을 만들게 되었을까?




‘코로나맵’, 

‘마스크맵’의 개발자, 그 시작 

 

지난 2020년 1월 국내 첫 확진자가 나온 직후,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는 다양한 가짜 뉴스가 확산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거짓 정보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공포에 떨었고, 이동훈 씨는 친 구와 가족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 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의 정보를 바탕으로 기획 하루만에 

코로나맵을 개발하였고, 이는 당시 1200만 명이 넘는 사용자와 4800만 조회수를 

달성하는 성과 를 거두었다. 또한, 그는 코로나맵에 그치지 않고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 ‘마스크맵’까지 추가로 제공하여 주변 지역의 마스크 재고 상황을 

실시간으로 제공하였다. 이후 대기업의 투자 제의 등 수익을 올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의도가 

변질되지 않도록 이러한 제안들을 모두 거절하였다. 그보 다 그는 “최근 저에게 

온 이메일을 보면 코로나맵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들이 많다”라면서 

“제가 지금까지 계속 업데 이트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항상 응원해주시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동훈 씨는 서비스 사용자들에게 

받은 응원과 격려에 계속 보답하고자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책임감 있게 

코로나맵을 운영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코로나맵’과 ‘마스크맵’을 개발한 이동훈 씨이지만, 

처음부터 개발자의 꿈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군대에서 여러 공모전에 참가한 그는 아이디어 기획 및 제작 경험을 쌓게 되었고, 

프로그래밍의 매력을 알게 된다. 이에 그는 ‘스크래치’라 는 아동용 프로그래밍 

언어부터 공부하며 군대에서 프로그래 밍을 독학하였고, 자격증 취득 후 2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진 행하며 커리어를 쌓아갔다. 이제 그는 독일, 미국, 스페인, 

카자흐스탄 등 10여개국의 기업·개인·학생들이 메일을 통해 제작 노하우를 

문의해 올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인정하는 기획 자, 개발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앞으로 코로나맵 관련해 서 얻은 서버 개발 경험과 데이터 

경험을 많은 분에게 공유하 고 싶다”라고 말한다. 또한, “프로그래밍을 통해 

사람들에게 긍 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어요. 코로나맵 외에도 다른 프로젝트에 

계속 도전할 생각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코로나맵을 통한 깨달음 

이동훈 씨는 코로나맵, 마스크맵을 개발하면서 데이터 공유의 

중요성을 체감했다고 한다. 코로나맵의 경우 초반에 질병관리 본부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데이터가 곧 자산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모을 수 있다는 것 또는 쉽게 

열람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양한 서비 스가 많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더불어 이동 훈 씨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개발자로서 한 가지 

원칙만 은 꼭 지켜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수익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서비스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 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면 수익은 알아 서 따라올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동훈 씨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수익보다는 선한 영향력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그이기에 

개발자로서 앞 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